혼자 추는 춤1
유진영
혼자 추는 춤1
유진영
박지수의 작업을 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우리는 같은 꿈을 꾸는 동기였다가, 작업이나 미래 따위의 진지한 이야기는 오히려 나누지 않게 되는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가, 현재는 각자의 길로 나아가며 이전과는 달라진, 하지만 분명 다정한 거리에서 서로의 삶을 들여다 보고 응원하게 되는 동료로 이동 중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친구에 더 가깝다.
내 안에서 친구와 동료를 다른 선상에서 위치 짓는 일은 진로를 틀어 본격적으로 직업인의 세계에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였다. 이제는 진심으로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좋은 친구이자 건강한 동료 사이가 양립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지만, 지난 3-4년 간은 막 발을 내딛은 일을 잘 하고 싶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흔한 말로 시간을 흘려 버리는 일들에는 신경을 거두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때마다 지나간 과거, 추억, 오랜 친구들은 언제나 나를 고민하고 주저하게 만드는 대상들이었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한 작가를, 아니 한 사람을 그 입장과 거리를 조정해가며 들여다 본 과정은 나 개인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그렇기에 박지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함께하는 것을 더 망설이게 만들기도 했다. 친구일 때의 내가 박지수를 향해 갖는 마음이 동료로서 그를 바라볼 때와 언제나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박지수의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비롯된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각을 무기로 삼고 있기에, 나 역시 두서 없는 솔직함을 앞세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서두를 연다.
1.
박지수는 자신을 둘러싼 풍경과 인물, 사건을 사진으로 채집해 화면에 옮긴다. 몇 단계의 가공을 거쳐 화면으로 옮겨진 장면들은 망상 혹은 꿈의 형태로 화면 안에 갇히게 된다. 그가 자신의 일상의 풍경으로 건져 올린 장면들은 누군가에게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생소하거나 난처한 순간들이다. 드랙퀸, 트랜스젠더, 크로스 드레서, 클럽, 야릇한 컬러의 네온사인이 빛나는 이태원의 밤거리 등 보편적인 사회적 규범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와 장소, 시간으로, 그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건네고 작업의 주인공으로 소환하는 박지수의 회화는 아마도 기록되지 않을 문화의 사적인 기록이자, 특정한 시공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작업의 모든 과정에서 박지수는 자기 자신과의 팽팽한 장력 싸움을 벌인다. 박지수는 경계 밖의 대상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를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어린 시절부터 아주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인 거절, 분노, 무력, 불화의 감정과 기억들은 박지수를 이루는 연약하지만 질긴 요소들이 되어, 자신만의 성벽을 쌓기 위한 주춧돌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발화한 문제를 바깥으로 내보이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를 주체/주제 삼아 직접적으로 나에 대해 설명하기 보다는 나를 둘러싼, 그렇지만 분명 나는 아닌 세계를 설명하는 간접적인 방법론이었다. 이는 솔직함, 혹은 격의 없음을 앞세운 고도의 위장 전술인 것일까?
이러한 태도는 화면 안에서도 무언가를 명료하게 증명하지 않으려는 듯, 몇 겹의 방어막을 덧대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유화와 각종 미디엄에 작업실을 떠다니는 먼지, 부스러기 까지 잡다한 재료들을 거칠게 섞어 두껍게 쌓아 올린 이미지의 덩어리는 질료가 성기게 얹혀 돌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프레스코화를 떠올리게 한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회벽이 굳게 되면, 떼어내는 것 외에는 달리 수정 방법이 없는 프레스코화처럼 박지수는 자신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온전치 못한 이미지들을 그리고, 칠하고, 긁어낸다. 안전하고 편안한 형태에서 한 번 더 멀어지게 된 이 이미지들은 종국에는 그 표면 위에 레진을 덮음으로써 투명하고 매끄럽지만 속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꿈의 형상을 갖게 된다.
극도의 폐쇄성은 도리어 그것을 가능하게 한 특정한 동시대성을 감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속화되는 사회에서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탈락 혹은 탈주한 세대에게 경계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는 외로움의 정서, 정상사회에 안착하지 못했다는 불안의 정서가 일관되게 팽배해 있는 모습을 찾는 것이 더는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반목의 태도는 조르조 아감벤이 정의내린 ‘동시대인’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아감벤은 『장치란 무엇인가』를 통해 시대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자들이 아닌, 자신의 시대를 증오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동시대인으로 정의 내린다. 동시대인은 이른바 정상으로 일컬어지는 세계를 감당할 수 없기에 세계와의 반목과 불화를 자청하고, 역설적으로 이 간극 때문에 그 시대를 더 잘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존재이다. 박지수는 자신의 시대가 구분 지어버린 규범과 정상성을 향한 애증을 절절히 토로하며, 그 선의 바깥에서 우리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2.
박지수와의 지난 만남에서 여러 이유들로 최근 더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러자 작업에 더 몰두하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대개의 창작 행위라는 것이 으레 그러하겠지만, 우리는 만드는 이가 치열한 고민과 고통을 동반할 때에만 발현될 수 있는 예측 불가의 에너지와 감정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술계의 동료로서지난 몇 년간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해 무작정 부딪혀 보기도, 그러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며 작업과의 씨름을 이어가던 작가에게 비로소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가 가늠이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박지수의 친구이기도 한 나는 작업과 직업이 개인의 삶에 선행되어서는, 혹은 삶의 형태가 작업의 자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3.
처음 글을 시작할 때 나는 동료이기에 가능한 글을 쓰고 싶었다. 정돈된 언어를 통해 작업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글을 쓰며, 박지수를 생각하고, 그의 작업을 더듬어 보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친구이기에 가능한 다정한 마음을 보태고 싶어 졌다. 이것은 분명 정돈된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 어려운 복잡한 감정일 것이다. 누군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향한 애정 뿐 아니라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과 그 시간 속의 나에 대한 좋음과 안도감에서 이어지는 행위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랫동안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지수가 작업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행위 역시 그 세계에 자신을 함께 위치시킴으로써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이자 마음가짐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삶은 결국 나 자신과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지독하리 만큼 고독한 과정이다. 그렇다면 나는 때로는 이해할 수 없기도 한 박지수의 혼자 추는 춤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서서 박수를 보내며 오래도록 지켜볼 것이다.
1 제목은 2015년에 발매한 언니네 이발관의 싱글 앨범 ‘혼자 추는 춤’에서 빌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