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 skin is brighter than my future
2017년 10월 5일 - 2017년 10월 22일 _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His skin is brighter than my future
2017년 10월 5일 - 2017년 10월 22일 _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촬영. 양승욱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세계를 연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동화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다. 하나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이유로 치자면 어떤 결정적인 의미를 은폐하고 있을 때이다. 결정적인 의미를 숨기면서 다른 의미로 그 표면을 덮는 것이다. 결정적인 의미를 덮어서 가린다는 점에서 그건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사실 알고 보면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도 그리고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잔혹동화도 이처럼 하나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실과 그 진실을 숨기려는 이데올로기와의 숨바꼭질과 관련된다. 하나의 내러티브로 구성된 줄 알았는데, 그 내러티브 밑에 또 다른 내러티브, 공공연하게 표면의 내러티브에 반하는 내러티브, 심지어 표면의 내러티브를 부정하는 내러티브가 숨겨져 있었다. 잔혹동화는 바로 그 숨겨진 내러티브, 그 숨겨진 진실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뭐가 진실이고 뭐가 이데올로기인가.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왜 진실을 덮어서 가려야만 했는가.
옛날에 깊은 산속에 일곱 난쟁이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곱 난쟁이들은 백설 공주를 새 식구로 맞아들였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이야기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얘기고, 어려운 현실도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고야 만다는 얘기고, 그러므로 하늘은 공평무사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사실은 이데올로기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일곱 난쟁이는 알고 보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억압된 오욕칠정일 수 있고, 백설 공주는 그 무분별한 욕망의 희생양일 수 있다. 그렇게 욕망을 해소할 수가 있는데, 깊은 산속인들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왜 이야기를 이데올로기로 덮어서 가리는가. 누가 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일정정도 가부장적 가치체계와도 통하는)가 건전한 의식과 건강한 시민을 교육하기 위해 생산한다. 그렇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피노키오 이야기(거짓말하지 마라)를, 산타 이야기(착하게 살아라)를 꾸며낸다. 거짓말하면 코가 자라는데 동양 사람들도 그렇지만 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큰 코는 쉽게 눈에 뛸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실생활에 불편을 야기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산타는 착한 어린이에게만 선물을 준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이야기, 그 숨겨진 진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금기와 위반 그리고 성적 일탈에서 찾는데, 많은 동화들(그러므로 이데올로기들)이 억압하고 있는 욕망이 대개는 성적욕망, 그리고 최소한 성적욕망이 다른 형태로 변형된, 정신분석학으로 치자면 전치된, 그러므로 제도를 속이는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리고 그 적극적인 혹은 소극적인 위반 가능성을 게이와 레즈, 트랜스젠더와 사도마조히스트와 같은 성적 소수자들, 범죄자와 장애우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찾는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지목한 위반(조르주 바타이유)에 해당하는, 정상성이 지목한 비정상성(미셀 푸코)에 해당하는, 제도가 지목한 희생양들(르네 지라르)에 해당하는, 상식적인 공중의 이름으로 단죄한(?) 타자들이다. 그들은 타자인 탓에 지금껏 온전한 자기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이성을 기준으로 비 혹은 반이성이라거나 정상을 기준으로 비정상이라는 불구의 이름 말고는. 작가의 그림이 알듯 모를듯 아리송한 것(숨기면서 드러내기 아니면 드러내면서 숨기기)과도 무관하지가 않다.